← back to archive
essay

재능을 결과로 말하지 않기 위하여

재능론에 대한 몇 가지 비판

  • #재능론
  • #결과론

들어가며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꼭 한 번 다뤄보고 싶었던 주제가 있습니다. 바로 "재능"입니다.

재능 이야기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누군가가 무언가를 잘하는 모습을 보면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재능이 있어." 반대로 누군가가 헤매고 있으면 또 쉽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재능이 없는 것 같아."

저는 이런 식의 재능론이 지나치게 결과론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잘하고 있는 사람, 혹은 잘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을 두고 사후적으로 붙이는 라벨에 가깝습니다. 재능이라는 개념은 그렇게 가볍게 다뤄질 만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그런 결과론적 재능론을 몇 가지 방향에서 비판해보려 합니다.

재능이라는 말은 한 가지를 가리키지 않는다

사람들은 "떡잎부터 다르다"는 말을 쉽게 합니다. 어렸을 때, 혹은 무언가를 막 시작한 입문 단계에서 두각을 드러내면 곧장 "재능이 있다"는 평가가 따라붙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레이싱 게임을 떠올려 봅시다. 자동차마다 성능 곡선이 다릅니다. 출발 속도가 빠른 차, 가속이 좋은 차, 최고 속도가 높은 차. 이 세 가지는 별개의 특성입니다. 출발이 빠르다고 최고 속도가 높은 것은 아니고 가속이 좋다고 끝까지 빠른 것도 아닙니다.

사람의 성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는 초반에 빠르게 치고 나가고, 누군가는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올라갑니다. 성장속도가 빠르다고 정점이 높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성장속도가 느리다고 정점이 낮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 둘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입문기의 두각만 보고 누군가의 정점을 단언하는 일은, 출발이 빠른 차를 보고 최고 속도가 높다고 단언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재능"이라는 단어로 가리키는 대상이, 사실은 한 가지가 아닙니다. 같은 단어 아래 전혀 다른 종류의 능력들이 묶여 있습니다.

저는 예술이 크게 두 영역으로 나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기술의 영역, 즉 구현의 영역입니다. 다른 하나는 미감의 영역, 그러니까 무엇을 만들 것인가, 무엇이 진정 아름다운가를 판별하는 영역입니다.

입문자는 보통 기술부터 배웁니다. 방법을 먼저 익혀야 무언가를 만들 수 있으니 당연한 순서입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이 기술의 영역을 빠르게 익히는 사람을 두고 사람들은 "재능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기술의 영역은 — 빠르든 느리든 — 상대적으로 모범답안이 있는 영역입니다. 진짜 정점의 높이를 가르는 것은 그다음의 영역입니다. 정답이 없고 해석의 여지가 무한히 열려 있는 곳. 진정으로 좋은 것에 대한 감각,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이 작동해야만 하는 곳입니다.

여기서 재밌는 역설이 발생합니다. 사람들은 입문 단계에서는 기술을 빨리 익히는 사람에게 재능 있다고 말하면서, 프로의 단계에서는 미감의 영역이 깊게 발달한 사람에게 재능 있다고 말합니다. 같은 단어를 쓰지만 가리키는 대상이 완전히 다릅니다. 이 역설은 우스꽝스러울 정도입니다. 마땅히 비웃어도 좋습니다.

능력은 조건이 충족되어야 발현된다

이 비판은 단순하지만 그래서 더 강력합니다. 능력은 그것이 발현될 수 있는 조건이 모두 충족되었을 때 비로소 드러납니다.

아무리 정교하게 설계된 냉장고라도 플러그를 꽂지 않으면 작동하지 않습니다. 부품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전원이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차이를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작동하지 않는 냉장고를 보면서 "이 냉장고는 성능이 떨어진다"고 말해버립니다.

사람의 능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능력은 단독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표면으로 올라오기 위해서는 다른 능력들이 먼저 자라 있어야 합니다. 글쓰기를 떠올려 봅시다. 글쓰기는 "글 쓰는 능력" 하나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어휘력, 자기 객관화 능력, 사고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인내, 자기 검열의 균형 감각 — 이런 인접 능력들이 일정 수준 갖춰져야 비로소 글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한참이 지나서야 갑자기 글이 터집니다. 글쓰기 능력이 그제야 생긴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쳐줄 다른 능력들이 그제야 모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이전의 침묵을 보고 "글에는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고 단정합니다. 받쳐주는 능력이 아직 못 자란 자리를, 본 능력의 부재로 오해하는 셈입니다.

누군가의 재능을 진정으로 말하려면 그 능력이 발현될 수 있는 조건을 살펴야 합니다. 그것을 받쳐주는 다른 능력들, 환경, 시기, 자원, 만난 사람, 주어진 기회, 본인의 심리적 상태. 이 무수한 조건들이 얼마나, 어떻게 충족되었는지를 봐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저 결과의 발현 여부만으로 재능을 판정합니다. 이건 평가가 아니라 판결에 가깝습니다.

재능 판단은 패배주의의 강요다

재능에 대한 또 다른 거꾸로 된 사고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재능을 수행의 결과가 아니라 수행의 전제조건으로 다룹니다. 한 가지 흔한 장면을 떠올려 봅시다. 어떤 부모가 프로그래머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아이가 컴퓨터에 관심을 보여요. 컴퓨터 학원에 보내도 될까요?" 자식의 미래를 위해 신중하게 묻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됩니다. 다만 질문의 구조 자체를 한번 들여다보면 묘한 지점이 있습니다. 시켜봐야 능력이 어떻게 발현될지 알 수 있는데, 시켜보기도 전에 재능 여부부터 묻고 있는 셈입니다.

묘함은 한 겹 더 있습니다. 능력은 입력된 분야에 종속되지 않습니다. 컴퓨터 학원에서 배운 지식과 경험이 반드시 프로그래머의 능력으로만 발현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 아이는 프로그래머가 될 수도 있지만 IT 분야의 기자가 될 수도 있고 논리적 사고가 발달해 수학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더 멀리 가면, 프로그래밍 언어를 다루던 경험이 자연어와 논리를 들여다보는 일로 이어져 언어를 연구하는 철학자가 될 수도 있고요. 어쩌면 컴퓨터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다른 영역에서 그 시기의 경험이 결정적인 발판이 될지도 모릅니다. 능력의 발현 경로는 1:1 매핑이 아닙니다. 입력은 한 곳이어도 출력은 어디서 터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게다가 아이가 무언가에 흥미를 보인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축복입니다. 아이는 세상을 배우는 중이고 그 중에서 컴퓨터라는 소재에 마음이 끌렸을 뿐입니다. 이 흥미는 그 자체로 지지받아야 합니다. 그 흥미가 어디로 데려갈지 아무도 미리 알 수 없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가능 공간을 사전에 닫아버립니다. 시켜보기도 전에 재능을 판단하고, 그 판단을 근거로 잠재력이 있다거나 없다고 단언하고, 그 단언으로 "해라" 혹은 "하지 마라"를 결정해버립니다. 저는 이것이 패배주의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능력의 종합적 결과가 어떤 양상으로 나타날지도 모르는 채로, 잠재력을 무시하고 "효용성이 없으니 하지 마라"고 단언하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건 남에게 강요되는 패배주의입니다. 패배주의는 보통 자기 자신에게 가지는 태도지만 재능 판단은 그것을 타인에게 미리 씌우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부모-자식 관계에서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직장 동료에게, 친구에게, 후배에게, 심지어 배우자에게도 우리는 시켜보기도 전에 재능을 판정합니다. 누군가의 미래를 본인이 시작하기도 전에 닫아두는 일. 이보다 더 게으르고, 더 잔인한 단언이 또 있을까요.

게으른 단어가 게으른 사고를 부른다

이 모든 비판의 밑바닥에는 결국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깊게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쉽게 판단하고 싶어합니다. 누군가의 성장속도와 정점의 높이를 구분해서 보는 일, 기술의 영역과 미감의 영역을 분리해서 보는 일, 능력이 발현되기 위한 무수한 조건들을 하나하나 따져보는 일, 판단하기 전에 가능 공간이 얼마나 열려 있는지 가늠해보는 일 — 이런 작업은 피곤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재능"이라는 단어 하나로 모든 것을 퉁쳐버립니다. 조건도, 환경도, 시간도, 누적된 노력도, 운도, 궁합도, 아직 열리지 않은 가능성도, 전부 한 단어에 욱여넣습니다.

이렇게 뭉뚱그리는 순간 분석은 불가능해지고 신비화만 남습니다. "저 사람은 재능이 있어"라는 말은 사실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설명을 포기한 사람이 설명을 포기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동원하는 단어에 가깝습니다.

게으른 단어 사용이 게으른 사고를 부릅니다. 아니, 어쩌면 순서가 반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게으른 사고가 게으른 단어를 부릅니다. 무엇이 먼저든, 둘은 서로를 강화하며 굴러갑니다. 그리고 그 굴러감의 끝에서 우리는 정작 가장 중요한 질문들을 잃어버립니다. 그 사람은 왜 그 시기에 그것을 시작할 수 있었는가. 어떤 조건들이 그를 거기까지 데려갔는가. 그가 멈춰 선 자리는 그의 한계인가, 아니면 단지 플러그가 빠진 자리인가.

재능을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싶다면, 우선 "재능"이라는 단어부터 의심하는 것이 순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