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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요요를 놓고 10년, 그제야 보인 것들

실패가 나에게 보여준 것

  • #탁월함

연습과 탁월함에 대해

한창 요요를 하던 시절 저는 요요 플래닛이라는 팀에 있었습니다. 활동하던 시절엔 한국 대회 1A 부문에서 5등과 8등을 했었고, 예선에서 떨어진 적도 있어요. 냉정히 말하면 잘한 성적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팀내에서 비교하자면 더더욱이요. 요요플래닛 팀은 거의 다 우승자 출신이었거든요. 그 사이에서 5등, 8등에 그친 제가 초라해 보였어요. 팀원들과 같은 자리에 서고 싶었고 정말 잘하고 싶었는데 끝내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제가 여기서 '탁월함'을 논하는 건 조금은 우습습니다. 상위 성적 근처에도 못 가본 사람이 할 소리인가 싶어요. 그래도 감히 개인적으로 느낀 "연습"과 탁월함"에 대해 몇 자 적어보려고 합니다. 실패를 통과한 사람의 회고라고 여겨주세요.

연습은 반복이 아니었다

예전의 저는 연습을 '반복하면 잘하게 되는 것' 정도로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너무 뭉뚱그린 개념인데도 딱히 의심하지 않았어요. 요요를 하면서 깨달은 것은 반복과 연습이 같은 말이 아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겪은 연습에는 두 단계가 있었습니다. 실험하는 단계와 숙련하는 단계. 웬만한 활동은 깊은 곳에 말로 옮길 수 없는 감각의 영역을 하나씩 품고 있다고 봅니다. 공부든 악기든 그림이든, 결국 남이 문장으로 건네줄 수 없는 자기만의 감각이 있다고 생각해요. 요요를 던지는 각도, 팔을 당기는 속도, 손가락에 주는 힘. 이런 건 누가 말로 설명해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밖에서 배울 수 없으니 어떤 감각으로 임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실험해야 해요. 각도를 바꿔보고 속도를 바꿔보고 힘을 바꿔보면서 기술이 성공하는 지점에 다가가는 거죠. 이 능동적인 실험이 없으면 남는 건 실패의 반복뿐입니다.

반복이 쓸모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반복은 찾아낸 감각을 몸에 새기는 일이에요. 다만 그건 방법을 찾은 다음의 이야기입니다. 순서가 뒤바뀌면, 없는 방법을 새기겠다고 같은 실패만 되풀이하게 되고요.

이 구조를 알고 난 뒤로 다른 일에도 의식적으로 변화를 줄 수 있었습니다. 관성처럼 반복하던 실패를 조금씩 걷어낼 수 있었어요.

에고는 바깥을 막는 벽이었다

이건 요요를 그만두고 나서야 보였습니다. 2017년 대회를 끝으로 저는 더 이상 요요를 잡지 않았어요. 한참 지나 '그땐 왜 그렇게까지 잘하고 싶었을까, 그렇게 욕심낼 일이었나' 싶을 만큼 요요와 거리가 생겼을 때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어요. 저는 제 고집 안에 갇혀서 제 방법을 좀처럼 바꾸지 못했더라고요.

더 솔직해질게요. 저는 오만했습니다. 제 방식만으로도 충분히 잘해낼 수 있을 거라 믿었어요. 주변에 도움받을 정보는 넘쳤습니다. 한국에서 제일 강한 팀에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그 조언들을 진짜로 받아들이진 못했던 것 같아요. 그때는 받아들였다고 생각했죠. 고개도 끄덕였고 납득도 했으니까. 하지만 조언을 듣고 방법을 바꾸지 않았어요. 사실 끝까지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겁니다.

저는 다른 선수의 기술을 카피하지 않았습니다. 기본기를 익힌 뒤로는 아예 카피할 생각도 안 했어요. 내 기술은 내가 만든다는 자부심에 취해 있었거든요. 그 자부심이 고집이 되고 에고가 됐습니다. 배우려는 태도가 없었던 거예요. 누군가는 남들이 닦아놓은 길을 끝까지 달려가 그 끝에서 새 기술을 연구할 때, 저는 맨 앞에서 혼자 씨름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자기 색깔을 뚝심 있게 밀어붙이는 것도 방법입니다. 거기서 독창성이 나오기도 하고요. 하지만 바깥의 것을 할 수 있는데도 내 길을 가는 것과, 바깥을 아예 차단한 채 내 길만 가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때의 저는 그 차이를 몰랐어요.

두 축이 다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바깥의 정보를 진짜로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걸 자기 관점으로 다시 세우는 것. 그런데도 굳이 바깥을 받아들이는 쪽을 더 힘주어 말하고 싶습니다. 자기 방식대로 하는 건 애써 마음먹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바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의식하지 않으면 잘 일어나지 않거든요. 자기 관점으로 돌아오는 건 어렵지 않아요. 다만 바깥을 한 번 통과하고 돌아온 관점은, 분명 그 전보다 다채로울 겁니다.

또 하나의 벽: 나에게 너무 높았던 기준

벽은 하나가 더 있었습니다. 이번엔 바깥이 아니라 제 안쪽에서 세운 거였어요.

지금 저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합니다. 이렇게 블로그도 쓰고 매일 커피를 내리고 노래에도 관심이 생겨 녹음하고 연습해요. 어느 쪽이든 그럭저럭 잘 해내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요요를 하던 때의 저는 스스로에게 너무 엄격했어요. 항상 부족하다고 느꼈죠. 아무도 저를 탓하지 않았는데도 팀원들의 좋은 성적에 저를 나란히 놓고 혼자 저를 탓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저를 높게 기대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습니다. 차라리 목표를 낮게, 예선 통과쯤으로 잡았다면 오히려 더 여유 있게 해냈을지도 몰라요. 저를 몰아붙이다 보니 '실패하면 어쩌지'라는 생각에 갇혔고, 그 생각이 실패를 자꾸 떠올리게 했고, 결국 그 실패를 실현시키더라고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면 던지는 것부터 뻣뻣해지듯이요.

분수에 안 맞는 목표를 쥐고 있었던 겁니다. 정말로 더 잘하고 싶었다면 제 수준에 맞는 목표를 줬어야 했어요. 너무 쉽지도 너무 어렵지도 않은 목표요. 그땐 막연히 높은 목표가 늘 더 좋은 결과를 준다고 믿었거든요. 하지만 그 목표는 저를 실패한 사람으로 정의했고 저를 밉게 만들었고 조급하게 만들었습니다.

제 수준에 맞는 목표와 작은 성취가 얼마나 중요한지 한참 뒤에야 알았어요. 사실 이건 지금도 잘 안 됩니다. 나도 모르게 완벽해야 한다는 생각에 붙들릴 때가 여전히 있거든요. 그래서 이건 아직 연습 중이에요. 천천히 해나가려고요.

돌아보며

두 벽은 결국 같은 일을 했습니다. 저를 굳게 만든 거예요. 에고는 남의 방법을 시도조차 못 하게 손을 묶었고 부담은 그 손에 힘을 잔뜩 넣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실험은, 손이 풀려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거든요.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려면요. 그러니 탁월함은 더 악착같이 매달린다고 오는 게 아니었습니다. 계속 실험할 수 있을 만큼 유연한 상태를 지키는 일에 가까웠어요. 그 유연함은 바깥을 향한 겸손과 나를 향한 관대함, 두 군데에서 왔고요.

저와 함께 요요를 하던 팀원과 친구들은 이제 다들 요요를 놓았습니다. 벌써 10년이 넘었으니까요. 여전히 그 친구들은 지금 제 인생의 베프들이고 함께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 시절 그 친구들 곁에서 저는 참 많은 걸 배웠습니다. 덕분에 저를 조금 내려놓을 수 있었고 철도 좀 든 것 같아요. 성적표에는 5등, 8등으로 남았지만, 남은 건 그게 다가 아니었어요.